본문 바로가기

타다_시승

혼다 레전드

반응형



레전드가 혼다의 플래그십이라는 말에 동의하니? 그럼 너는 사전에 나온 ‘플래그십’의 뜻을 아주 잘 알거나 레전드를 좀 몰아본 사람일 거라 생각한다.


플래그십(Flagship); 기함, 제독함, (선박이나 항공사 소유의) 최고급 모델, (그룹이나 시스템 내에서) 가장 중요한 것, 혹은 주력 상품, 본점, 본사

“나 어제 신형 레전드 시승했어.”
“그래? 어때? 플래그십다워?”
“그게 플래그십 모델이야?!”

시승 내내 레전드가 혼다의 플래그십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사전에 나온 플래그십 뜻에 비춰보면 레전드는 플래그십 모델이 맞다. 혼다의 기술력이 총동원된 가장 값비싼 차가 레전드이고 그게 플래그십이니까. 그런데 왜 시승하면서 플래그십이란 사실을 망각했을까? 플래그십은 자고로 독일 메이커의 7시리즈나 S클래스처럼 쇼퍼드리븐카여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레전드를 두고 플래그십이냐 아니냐 하는 갑론을박은 우리나라에서 유달리 심하다. 혼다는 그냥 혼다가 아니라 ‘기술의 혼다’라고 불렸지만 기술력 출중한 혼다의 최고급 모델은 한국 사람들에게 온전한 플래그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혼다로써, 더 정확히 말해 혼다코리아로써는 통탄할 일이다. 혼다가 나름의 역량을 총동원한 레전드가, 북미에서는 어큐라 RL로 가치를 인정받는(판매량은 차치하고) 레전드가 국내에서는 석연찮은 플래그십으로 치부되고 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수입차 값 비싸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에서 플래그십으론 값싸게 느껴지는 6780만원의 합리적인(?) 가격? 기대보다 작은 차체 크기? 사장님이 향유하기엔 협소한 뒷좌석? 너무 작은 버튼들?

레전드는 플래그십답지 않게 작고 카리스마가 빈약하다고 볼멘소리를 하던 고객에게 경종을 울리듯, 혼다는 신형의 근육을 키우고 몸매를 가꿨다. 엔진 배기량도 3.5ℓ에서 3.7ℓ로 늘리고 최고출력도 307마력까지 끌어올렸다.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차 자체의 분위기는 플래그십의 타이틀을 거머쥐기에 부족함이 다분하다. 한 달에 1000대가 넘게 팔리는 어코드와 덩치도,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베스트셀링 모델과 플래그십 모델의 분명한 차이가 ‘확’하고 느껴져야 하는데, 그 중요한 게 눈에 안 띈다. 
 

플래그십 레전드가 평가절하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혼다라는 브랜드 이미지와 혼다코리아의 마케팅 정책 때문이다. 혼다는 프리미엄 메이커보다는 대중차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최고급 모델이라지만 수입차 고객이 으레 생각하는 플래그십과는 더욱 격차가 커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혼다 코리아의 국내 라인업 구성에 있다. 워낙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모델에만 집중하고 있어서다. 아이큐 180짜리 멘사 회원이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달랑 ‘플래그십’이라는 명찰 하나만 달고 다니는 격이니 누가 그 영재성을 알아보겠나. 오히려 어코드와 CR-V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어 보이면서 플래그십이니까 이 정도 가격은 해야 한다며 어리광 피우는 걸로 미움을 사기 십상이다.

혼다코리아는 레전드가 온전한 플래그십 모델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타보지도 않고, 몰아보지도 않고 폄하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아쉬운 마음만 대형 컨테이너만큼이다. 사실 신형 레전드는 만족스러운 부분이 꽤 많다. 공간활용성은 패밀리 세단으로 쓰기에 부족하지 않고, 조잡할 정도로 산만하게 많은 버튼이지만 손에 익으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시트는 바른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기에는 아쉽지만 보드랍고 말캉해서 좋다. 바퀴 네 개가 제각각 명민하게 움직이는 비범한 핸들링도 빼놓을 수 없다. 하체는 유럽의 엘리트들처럼 직관적이고 타이트하지 않지만 소리 없이 강하다. 슈퍼핸들링 AWD(SH-AWD)와 맞물린 달리기는 듬직하고 날카롭다.

자정을 넘어 한적해진 도심 속 와인딩로드로 레전드를 몰았다. 진짜 슈퍼핸들링이 아니라면 부르기 민망한 이름, SH-AWD의 진가를 몸소 느끼기 위해서였다. 기어박스의 세팅을 스포츠모드로 고정하고 속도를 올렸다. 초행은 아니지만 눈에 익지 않은 고갯길을 얕봤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

처음 얼마간은 탐색전이라는 생각으로 달릴 요량이었는데, 어느새 초심을 잊었다.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속도로 평범하지 않은 고갯길을 훑기 시작하자 타이어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계기판 중앙 아래의 트랙션 컨트롤 경고등이 바빠졌다. 어지간해서는 변화가 없던 SH-AWD의 트랙션 분배 그래프는 코너를 잡아채는 순간 한쪽 뒷바퀴에만 5개까지 집중됐다. 구동력을 보강해야 할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크게 굽이치는 코너에서도 좀처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타이어가 미끄러지고 차체 전체가 움찔거리며 주춤하기는 해도 제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예측과 제어가 가능한 핸들링 덕분에 운전 재미와 안전의 경계선에서 짜릿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다. 카리스마가 부족한 생김새와 달리 섀시 강성에선 플래그십의 면모를 찾을 수 있었다. 

플래그십은 쇼퍼드리븐카여야 한다는 한국적 논리와 정서만 배제한다면 레전드를 플래그십으로 받아들이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다. 독일 메이커의 플래그십에 비해 인테리어와 버튼이 조잡하고 실내공간과 뒷자리가 광활하지 못하더라도 레전드는 플래그십답다. 어른 넷이 앉기에 부족하지 않고 부드러운듯 명민하고 담대하게 반응하는 하체감각과 지칠 줄 모르는 퍼포먼스는 기세 등등하다. 삶도, 레전드를 플래그십으로 인정하는 것도 마음먹기 달렸다.   

혼다 레전드
레이아웃 앞엔진, SH-AWD, 5인승, 4도어 세단
엔진 V6 3.7l SOHC 307마력, 37.7kg·m
변속기 자동 5단
길이×너비×높이 4985×1850×1455mm
휠베이스 2800mm
공차중량 1870kg
브레이크 앞/뒤 V디스크/V디스크
연비 8.6km/리터
가격 6780만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