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차가 존재한다. 살 수 있는 차와 살 수 없는 차. 여기 소개하는 이 녀석은 살 수 없는 차다. 비싸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상황과 환경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아우디의 기함 A8은 운전석에 올라 직접 차를 모는 재미도 훌륭하지만 뒷좌석에 느긋이 앉아 베테랑 운전자의 실력을 음미하며 이동하기에 더 어울리는 웅장한 녀석이다.
세대를 변경해 등장한 A8은 2017년 바르셀로나에서 공개됐고 국내에는 2018년 부산 모터쇼를 통해 데뷔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2019년 말 정식 데뷔하게 됐다.
생김새는 젊어졌다. 원래 아우디는 트렌디하고 패셔너블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강한 브랜드다. 기함이지만 다른 경쟁 모델들보다 시크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은 여전하다. 최근 먼저 선보인 A6에서 진화한 최신 디자인을 경험한 터라 A8의 달라진 디자인이 친숙하다. 아우디 얼굴의 DNA인 싱글 프레임 프런트 그릴은 세대를 바꾸면서 더 크고 넓어졌다. LED 헤드 램프를 양산차에 상하향등 모두 넣은 선구자답게 매트릭스 레이저 LED 헤드 램프도 품었다. 시인성 뿐 아니라 디자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아우디는 조명 회사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리고 고급스럽고 매력적이다. 낮보다 밤에 더 찬란해진다. 일정하고 또렷하게 빛나는 선과 면의 조명 잔치에 실내보다 밖에서 이 녀석을 보는 이들의 눈이 더 즐겁다. 물론 실내조명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실내에 앉은 사람들도 황홀하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갑자기 고백 하나 하고 넘어간다. 이제까지 훌륭한 실내조명은 간접 조명이라는 생각이 컸다. 직관적으로 빛을 내 화려함을 뽐내는 조명은 간접조명에 비해 저렴하고 촌스럽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A8의 실내조명을 경험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곳곳에 조명 라인을 두르고 직접 빛을 내 실내 분위기를 조율하는 놀라운 실력과 능력에 직접 조명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A8은 옆에서 보면 길고 길고 거대하다. 특히 뒷문 크기에 놀란다. 모델명 뒤에 L이 붙은 덕이다. 길이, 특히 뒷공간 길이를 늘린 롱 휠베이스 버전이다. 하지만 기다란 차체의 비율이 낮고 안정적이어서 길이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말끔한 인상이다. 헤드램프에서 테일램프까지 이어진 손이 베일 듯 날 선 캐릭터 라인이 도회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양 끝 테일램프를 이어 붙인 기다란 가로 바 램프가 뒷모습의 포인트다. LG 디스플레이 OLED를 사용한 방향지시등의 안에서 밖으로 흐르는 빛이 자연스럽고 매끈하다. 이렇게 매끈한 실루엣이지만 제원 상 크기는 상당하다. 길이가 5310, 너비는 1945, 휠베이스는 무려 3128mm나 된다.
무드 조명이 현란한 실내는 하이그로시와 가죽, 알루미늄으로 치장해 라이벌들보다 젊고 세련된 맛을 강조한다. 디지털 계기반과 센터패시아 가운데 터치스크린 모니터에 거의 모든 기능을 넣어 단순한 첨단 실내를 완성했다. 공조장치를 켜면 센터패시아 상단이 갈라지면서 에어벤트가 등장한다. 대시보드를 쭉쭉 가로지르는 메탈과 우드 트림이 커다란 실내를 더 크게 보이는 효과를 연출한다.
아우디의 인포테인먼트였던 MMI 컨트롤러 대신 모든 기능을 터치스크린 안으로 넣었다. 아우디는 이를 MMI 터치 리스폰스라고 부른다. 덕분에 기어노브 주변이 깔끔해졌다. 10.1인치 터치스크린 모니터는 터치 방식이지만 누르는 강도에 맞춰 진동 반응을 일으키는 햅틱이라 조작의 오류나 불편함도 거의 없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어도 실내는 여전히 고요하다. 3.0리터 V6 터보 가솔린을 품은 이 모델은 340마력의 최고출력과 51.0kg.m 토크를 낸다. 직분사 터보차저에 48V 시스템과 벨트 구동 제너레이터를 넣어 스타트 스톱 시스템과 효율성을 돕는다. 구동방식은 아우디의 네 바퀴 굴림 시스템인 콰트로가 들어있다.
가속은 정숙하고 안락하고 부드럽다. 날카로움 대신 일정하게 묵직하다. 기함의 예의이자 기본이다. 2톤이 넘고 5미터가 넘는 차체에 어울리는 거동이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엔진 회전 질감과 상승이 가속과 일정한 비율로 이어지고 8단 자동변속기는 언제 톱니를 바꿔 무는지 모를 만큼 아늑하다.
가장 놀랍고 흡족한 것은 하체 감각이다. 대단히 묵직하고 부드럽다. 도로에 메모리폼을 깔고 달리면 이런 감각이지 싶다. 속도를 높일수록 바닥에 착 깔려 매끄럽게 치고 나가는 맛이 대단히 흡족하다. 고급 브랜드의 기함들은 대부분 에어 서스펜션을 품는다. 이 녀석도 그렇다. 하지만 같은 에어 서스펜션이라도 하체 구조와 세팅에 따라 감각은 차이가 난다. 감히 이야기하자면 이 녀석은 메르세데스-벤츠의 매직 라이드 컨트롤 시스템을 제외하면 S-클래스 뺨치는 맛을 선사한다. 참고로 시승차에는 빠졌지만 2019년 아우디는 AI 서스펜션도 개발해 양산 모델에 적용했다. 전기모터로 차의 자세 변화를 최적화해 제어한다. 20개가 넘는 센서를 사용해 노면을 읽어 나가며 매끈한 승차감과 스포츠 세단 같은 핸들링까지 선사한다고 한다. 옵션에 따라 해외 A8에는 적용되지만 국내에서는 만날 수 없다.
오랫동안 움츠렸던 아우디가 슬슬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반성의 시간은 제법 길었고, 여전히 부정적인 여론도 있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세계 시장에서 아우디의 성장세는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라인업 확장이나 모델 데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해외 데뷔 시기가 좀 지나 신선한 맛은 덜하지만 아우디의 대표 모델과 트림들이 슬슬 국내시장에 데뷔하기 시작했다. 세계 시장에서 아우디가 선전하고 있는 만큼 국내 시장에서도 다시 자리를 잡고 프리미엄 브랜드로 예전 같은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 시험대에 기함 A8L 모델이 올랐다.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 궁금하지만 나름 꼼꼼히 타고 보고 만져본 결과 제법 따뜻한 훈풍이 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승차감과 하체 감각, 디자인과 조명에서 아우디의 진가가 톡톡히 빛나고 있다.
글 이병진